하나님께서는 한 번 뜻을 정하셨으면
절대로 그 뜻을 변경하시지 않는다.
사람은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을 세워도
다시 수정하고 재설계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혜를 초월한 것이기에
절대로 한 번 정하신 것에는 수정이나 재설계가 없으시다.
그래서 전 성경은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아무리 설명하고 핑계하며
적당한 구실을 찾아 이야기해도
하나님의 뜻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개 밥그릇을 천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개 밥그릇을 귀하게 쓰시려면
세상의 그 어떤 금 은 그릇보다 귀하게 쓰임 받는다.
따라서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상식을 버리고 절대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죽음을 놓고 몇 번이나 몸부림친다.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시고는
그토록 피하고 싶은 길이었지만
초연히 십자가의 길에 들어선다.
하나님은 뱀과 하와의 대화를 다 듣고 계셨다.
뱀이 온갖 감언이설로 하와를 유혹할 때
하와가 알고 있는 얕은 진실에
뱀이 자기의 생각을 첨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하와를 유혹 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래서 결국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보면서도
말없이 보고만 계셨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나무를 건드리려고 할 때는
화염검을 든 그룹천사들을 명하여 에덴을 지키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타락한 인간은 절대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서는 알 수가 없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불평 불만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다.
금 은 같은 아들이라도 바치라면 바쳐야 되고
욥처럼 이유 없는 시험이 몇 십년 이어져도
끝까지 참으라면 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홍수심판 후 사람들은
다시 물이 넘쳐나도 빠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바벨탑을 세우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완전히 흩어버리셨고,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을 주려고 하나
리브가는 온갖 저주를 무릅쓰고 야곱에게 축복을 돌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만다.
하나님의 교회는 물론이고 어느 사람이든지간에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사마리아 유대가 원수 되듯이
같은 지체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자는 서로 원수가 되고 만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의 방법에서 조금이라도 변형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예만 필요한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하나님의 뜻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욕심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에
흡니와 비느하스는
그 아버지 엘리와 함께 비참하게 죽고 말았고
부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요나단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주어진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기가 있다.
부자 청년의 경우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내게 주어지는 위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뜻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가려면 400년 정든 땅을 버려야만 하고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들이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고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와 그물을 다 버려야만 했다.
노아 역시 방주 만들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는
40-50년을 미친 자라는
온갖 조롱을 다 들으면서 까지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위기를 당당히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을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쓰임 받은 자들만이
궁창의 빛보다 더 밝게 비추는 삶을
살아 갈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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