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대답하고
내가 하나님을 부르면 또 하나님이
스스럼없이 대답하시는 관계가 참 조화의 삶이다.
기도 응답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바알 선지자 850명은 불러도,
불러도 저들의 신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단 한 번의 요청에 하늘로부터 응답을 받는다.
결국 이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증언부언이요,
주절거림의 소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나를 믿고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임한다.
하나님이 나를 믿을 수 있는 그릇이 되자.
내가 어떤 형편 어떤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이 내 삶에 관심을 갖고
내 일거수 일투족이 그 분의 감동이 되어야 한다.
그 분의 감동이 내게 임하면
기도가 깊어지고 충만해 질 수 밖에 없고
충만한 기도생활에는 방언이 터지고 예언이 터진다.
주님과 온전한 조화를 못 이루면 기도의 충만함이 없고
기도해도 답답하고, 기도하고도 의심이 되고 고민만 깊어진다.
결국 저주란 내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경우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찾아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다는 것만큼 엄청난 비극이 없다.
내가 그렇다고 부르짖고 찾고 찾아도
하나님이 나를 못 믿는다는 것만큼 큰 불행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부조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의로운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조화를 못 이루다가 보니
자가들은 죽도록 주의 일을 하는데도
주의 일을 하면 할수록
그것이 주님과 오히려 원수가 되어 버린다.
이 문제를 잊지 말자.
내가 주의 일을 하며 정말 열심을 내는데
그것이 오히려 주님과 원수가 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설멍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거의 모든 크리스찬들이
주님과 상관없는 열심,
주님이 듣지도 않는 기도,
주님이 받으시지도 않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신의 모든 행위는 주님이 받으신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한 것에 대하여
당당하게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범사에 감사가 넘치고 있을까.
이제 우리들에게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이제는 주님이 나를 신뢰하는 자가 되도록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자.
주님이 나를 믿을 수 있는 자가 되자.
주님이 나를 믿을 수 있는
주님과 조화를 이루는 믿음을 분명히 소유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좋아하지 말자.
우리는 성령 받은 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가 있고 종의 자리에 서는 자도 있다.
즉 다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종의 영을 받고 사는 자가 있고 아들의 영을 받는 자가 있는데,
그것의 결과는 시간이 흐르면 정확하게 드러난다.
종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종은 언제든지 배신하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후일에 주의 성령이 밝히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서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 미혹되는 자가 있고
이미 그렇게 된 자들이 껍데기만 포장한 채
교회에 앉아 있는 이도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를 보라.
주님에 대한 그토록 엄청남 신앙고백을 해놓고도
또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는데도
그는 자기에게 불이익이 올때는
예수를 모른다고 3변이나 부인한다.
제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자.
주의 간섭이 즐거운 자가 되어
아들의 권세를 가진 자가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에서
그 분의 충만함이 넘치는 아름다운 조화의 사람들이 되자.
그래서 하나님이 내 소리를
어디서나 들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자.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분명해져서
아버지의 자녀가 되면 포도나무 비유처럼
아버지와 나는 떨어질 수 없는 부자관계가 되고
이 때 아버지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혀주며
진리의 사역자가 되게 하여
나로 하여금 진리를 옳게 분별하는 역사를 일으킨다.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를 절대로 거꾸로 하지를 말자.
사역이나 일이 우선이 아니라
아버지와 나의 하나 됨의 관계가 최우선이다.


,참조화.
아브라함.
200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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