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대한 불신으로 말미암아
물세례를 줄 자격이 상질 되어 물 세례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넘어간다.
여기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만이 세례를 줘야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세례를 주는
불법을 저지르냐고 반론을 하면서부터 논쟁이 생긴다.
결국 이런 문제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을 했다면
예수의 제자로 들어가서 복음을 함께 전하는 자가 되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과 하늘의 강한 능력에 도취된 한 순간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했지만,
人間的으로는 아무리 봐도 어떻게 저런 사람이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 싶어 곧 의심을 했기에
세례요한은 또 다른 사회적, 인간적, 세상적인 지위가 높고
신분이 있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실수가 이러한 아픔을 당하고만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로 영적인 모든 사건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인간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모두는 영이다.
영만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렇게 많은 구도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영적인 맥을 분명하게 잡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었으면서도 예수를 영접치 못했다는 것은
그 모든 열심과 구도의 생활이 헛것이라는 결론을 가져다준다.
제발 허공을 치듯이, 향방 없는 달음질을 치지 말자.
내 평생 부르며 섬기며 헌신해왔던 예수로부터
마지막 그날에 나는 너를 모른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문제는 세례를 잘못 받음에 그 원인이 있다.
세례에는 주님의 제자와 요한이 베푼 물세례가 있고
우리 예수님이 직접 주시는 불세례가 있다.
물세례란 죄악의 물속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겉 사람 곧 육신의 죄를 씻는 의식이요,
불세례란 속사람 곧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성례이기에
반드시 구원받으려는 자는 물과 불로써 거듭나야만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씀(요3:5)이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물세례만 받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불세례를 같이 준 사건(행2:38~39,8:14~17)을 기억하자.
물세례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노아 방주를 통하여 죄악의 심판 속에서도 구원받은 뜻이요,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승리의 뜻이다.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깨끗해진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물세례란 육체의 죄를 씻고, 과거를 청산하는 표요, 구약의 완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의 완성을 이루려면
예수님이 주시는 불세례를 같이 받아야만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이루며 거듭남의 완성 자가 된다.
예수님은 머리이시기에 불세례를 주고,
제자들은 지체이기에 물세례를 주기에
오늘날도 주의 종들을 통한 물세례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성령세례인 불세례를 받아야만
새로운 人間인 생령으로 재창조 받는 것이다.
물세례만 베푼 세례요한은
결국 그가 전하는 모든 말에 일관성이 없고, 횡설수설하다가
참 진리의 도를 전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가 죽고 말며
불세례를 베푼 예수님은 물세례와 불세례의 온전한 조화를 통해
사람들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해도 때가 될 때까지는 감히 잡을 수가 없었고,
그의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기에
잔잔하고 부드럽고 겸손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민중들의 가슴속에 변화를 일으키고 아리고 쓰린 상처들을
아물게(마7:29,요7:45,46)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잊지 말자.
구원의 완성은 물과 불세례를 받아야만 완성을 이룰 수가 있지,
불세례를 받지 않는 한 아무리 물로 내 머리에 수백 번 찍어 발라도
그는 주와 상간 없는 짓을 하다가 요한처럼 망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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