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많은 기능 가운데서 특별히
요한복음 16:13을 보면 우리를 인도하는 인도의 영으로 나타난다.
성령님은 지혜와 모략의 神(사11:2)으로서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 하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는 실패나 후회가 없으시다.
人間의 머리와 얄팍한 경험으로는
주의 인도하심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이 있으나
주의 인도하심에 순복한 자의 모든 결론은
성령님에 순종한 자는 모든 것이 合力해서 선을 이루게 된다.
이왕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으면
고생 없이 왕으로 바로 만들 수도 있고
굳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지 않으셔도
우리 하나님의 전지 전능 하심은 얼마든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그렇게 우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게 하셨을까.
이런 문제의 답을 바로 아는 것이 주의 神의 지혜의 역사이다.
그러면 성령님은 언제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영으로 나타나시는가?
우리의 삶의 길에는 그 누구도
한번 갔다 온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를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도 바울의 말처럼 수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데
좁고 좁은 길, 넓고 위험한 길, 가다가 돌아서야 되는 길,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는 길···· 등이
우리의 가는 걸음걸음마다 전개되고 있다.
세상에서도 좋은 지도자 만나면 좁은 곳으로 인도받듯이
결국 주의 神의 인도를 정확하게 받는 축복을 받게 되는 자만이
가장 완벽하고 정확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좋은 지도자란 자기의 경험이나 논리를 버리고
주의 神이 역사할 때 그 뜻을 따라 철저히 움직이는 자들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 엄청난 지도자라고 해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이 없으면 움직이지를 않았고
우리 예수님은 말 한마디도 자의로 하신 적이 없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같은 지체이기에
기능이 다르다고 해서 절대 미워하지를 않는다.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등.
우리처럼 교파를 초월하여 순수하게 원색을 따르려는 자들이나
누구든지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에 맞지 않고
같은 교단이 아니고 같은 신학의 노선이 아니라고 해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한 몸, 한 지체들이기에 결코 비난하거나, 참소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내 교회의 목사님이 주의 神의 인도를 받는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하자.
목자가 성도들을 잘못 이끌면
소경이 소경을 이끌다가 모두를 사망으로 이끌어 내듯이
모든 양떼를 다 죽음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이런 원리는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알고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자녀들도 다 아는 일들이다.
그리고 주의 神이 인도를 받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물이 없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돌산으로 인도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기적이 준비되어 있었다.
절대로 불평하지 말라.
주의 神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에는 그대로 순종만 하라.
우리는 미래를 살아보지 못했다.
하늘나라는 주의 神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절대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할 필요도 없다.
때때로 실컷 걸어갔다가 이스라엘처럼 40년을 돌고 돌 수도 있다.
어떤 자는 욥처럼 애매히 고난을 당하다가도 끝이 좋을 수도 있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평생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즐겨 헌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의 神이 나를 이끄는 이상
그것에 순종만하면 반드시 결론은 合力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요,
그는 천국의 주인공이 된다.
따라서 부자 청년처럼 영생을 위해 주의 神에 이끌리어 왔다가도
자기 욕심으로 그 길을 거부하면 안 된다.
첫째 아들처럼 ‘예’하고도 ‘아니오’의 길을 걸으려 하지 말라.
설령 ‘아니오’ 했다가도 강하게 성령의 감동으로
주께서 우리의 길을 돌이키면 다시 ‘예’의 길로 돌이키고
모든 것 다 허비했지만,
주의 성령께서 이끄실 때는 다시 돌아가는 탕자처럼
부끄러움 무릎 쓰고 체면불구하고 돌아가면 된다.
이것이 내가 다시 사는 길이요. 승리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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