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꽃'이라는 순 우리말이 있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전에
한두 방울씩 후드득 꽃송이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비꽃이라고 한다.
이 표현의 꽃은, 그러므로 처음 내는 길의 의미다.
비꽃이 먼저 길을 내야 그 길을 따라 가랑비든 자드락비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부슬비가 우련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밤늦게 전화벨이 울렸다.
제법 거나하게 취한 후배의 들뜬 목소리가 잡음에 섞여 들려왔다.
"선배님, 접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예전 동료들이랑 술 한잔 하고 있는데요.
문득 선배님 생각이 나서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감히 전화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참 오래된 인연이고, 서로 격의 없고 스스럼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후배는 '감히' 전화를 드렸다는 표현으로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나는 태어나기를, 단정하고 외따롭고 고요한 것에 끌리는 성정으로 타고난 모양이었다.
물고기였다면 나는 아마도 맑고 서늘한 물에서 산다는
열목어나 산천어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나를 후배들이 친밀하게 대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자신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내보여도 좋을 만큼
내가 막역하고 도량 넓은 선배는 아니었으리라.
꼿꼿한 선비나 지고한 문사는 후세 사람들에게나 멋지지
동시대 붕우들에게는 얼마나 꼬장꼬장하고 까탈스러운 존재였겠는가.
나는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채찍을 등에 받는 것처럼 아팠다.
다니던 회사에 후배를 추천했고, 우리는 파란의 시절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에게 마중물이었고, 비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가 본격으로 퍼붓기 시작하면 비꽃은 흔적도 없이 잊힌다.
그게 세상의 인심이고 물비린내 나는 삶의 눅눅한 단면이다.
내가 자처한 외로움의 밑면을 쓰다듬듯
후배는 처음의 때를 잊지 않고 있노라고 내게 말한 것이다.
외로운 자리가 뭉클하게 뜨거워졌다.
비꽃을 기억해 준 것만도 먹먹하고 고마워
나는 창문을 살짝 열어 빗소리를 들이고 박하꽃 같은 잠을 잤다.
아침에 하늘이 말갛게 개어 있었다.
나는 숙취로 힘들어 할 후배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날이 개었다. 감히 너에게 문자를 보낸다. 해장은 꼭 하렴."
*림태주의 <관계의 물리학>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